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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아라] To. 뀨들님 上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아 젠장. 그냥 흘려 들어라.”

 

그렇게 말하는 아라키타의 표정은 평소답지 않게 심술기도 없었고 그렇다고 유쾌해 보이지도 않았다. 긴장했다고나 할까, 그런 얼굴로 무슨 말을 할 셈인가 싶었다. 뒷머리를 긁으며 머뭇거리는 녀석을 바라보며 킨조는 혹시나 하고 기대를 품었다.

“네 녀석은 들어줄 거라 믿으니까. 사실은 나…….”

그렇게 웅얼거리며 시작된, 아라키타가 그토록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그날의 이야기는 마치 게워낸 위액처럼 썼고, 속을 쓰리게 만들었다. 그걸 뱉어내는 아라키타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좋아하는 녀석의 옛날 연애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상황도, 자신이 처음이 될 수 없다는 현실도 다 견뎌낼 수 있었다. 만약 그게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그것들을 끌어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줄곧 바라고 원하던 일이 아라키타에게는 트라우마라는 사실만은 그렇게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자신의 욕심이 크다고 스스로를 질책도 해 보았고, 마음을 조금 비우고 시간을 가져보자는 결심도 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스스로의 포용력에 회의감을 가질 정도였다.

 

‘미안하다. 네가 날 믿고 나에게만 이야기를 해도 기뻐할 수 없어, 나는.’

 

 

책상에 앉아 옆머리에 손을 짚고 앉아 있던 킨조는 짧게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란한 생각을 하는 동안 시간이 흘러 거의 자정이 되어 있었다. 주말 밤이라도 덧없이 늦게 자는 습관은 없었기에 이만 자려고 이불을 들추고 침대 위에 한 쪽 무릎을 올리는 찰나였다.

쿵쿵 하고 주먹으로 현관을 가볍게 치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킨조는 조금 긴장해서 현관으로 다가갔다. 도어 체인을 걸고 나서 누군지 물으려는데 밖에서 먼저 말이 들려왔다.

“킨조……, 좀 재워줘.”

 

아라키타의 목소리, 그런데 말끝이 늘어지는 것이 술이라도 먹은 모양이었다. 킨조는 체인을 다시 풀고 문을 열었다. 밖으로 열리는 문 때문에 한 발짝 물러섰던 아라키타는 휘청하면서 현관 문틀을 손으로 짚었다. 그러더니 거의 인사하는 양 상체를 푹 숙인 채 손만 들어 흔들흔들했다. 킨조는 조금 당황해서 그를 불렀다.

“어이.”

“아-, 미안. 집 열쇠가 안 보여서. 주머니에 분명 넣었는데 말야……. 지금이라도 나오면 그냥 집에 갈 테니까.”

그러면서 자기 바람막이 주머니를 다시 뒤적인다. 아니 그럴 거면 오지 말지……. 그런 아라키타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은 동전 몇 백엔, 머니클립, 그리고 술 깨는 음료의 병뚜껑이었다.

“아? 이건 또 왜 들어있는 거야?”

킨조는 살며시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편의점에서 음료를 사 마신 다음에 병뚜껑을 주머니에 넣고 열쇠를 쓰레기통에 버렸겠지 아마도……, 아니 분명히. 멍하니 자기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아라키타의 손을 잡아끌고 방에 들였다. 그런 킨조의 표정을 살핀 아라키타는 신발장을 짚고 운동화를 벗으며 소리쳤다.

“아 미안해 임마. 그런 얼굴로 보지 마!”

“그런 거 아니다.”

그래, 그런 거 아니다. 네 생각을 하며 심란한 도중에 네가 와서 곤란해서도 아니고, 오밤중에 폐를 끼치고 방해받아서도 아니고, 그저 바보 같을 뿐이지. 킨조가 딱해 하는 표정을 지은 것은 그런 연유였다.

“씻고 자도록 해.”

“칫솔은……?”

“전에 네가 밑에 슈퍼에서 사다 쓴 거 아직 있다.”

“엉…….”

킨조는 아라키타가 벗은 바람막이를 받아다가 벽에 걸고, 그가 위태위태하게 움직이며 양말을 벗고 바지를 종아리까지 걷어 올린 뒤 욕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아-.”

아라키타는 침대 위에 올라왔다. 킨조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가 드러누우며 그제야 살 것 같다는 듯 안도의 숨을 쉬었다. 침대 사이즈는 슈퍼싱글인데 역시 남자 하나가 더 들어오니 확 좁아졌다. 물론 킨조는 그 비좁은 느낌이 싫지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싶어서 옆의 스탠드를 켜 놓고 책을 읽던 킨조가 물었다.

“무슨 일로 늦게까지 마셨지?”

“아? 그냥 뭐, 심란해서.”

“……예의 그 일인가.”

아라키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핫 하고 특유의 비웃음 같은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건 역시 그렇다는 거겠지. 아무래도 그 조소의 대상은 자기 자신이 아닐까.

“멍청이야 난. 멍청한 거 안다고.”

킨조는 아라키타 쪽으로 돌아보았다. 아라키타는 이쪽을 흘긋 보다가 눈을 감더니 중얼거렸다.

“짜증나. 난 그 자식 싫지 않았어. 그렇지만 안 되는 걸 어떡하라고. 아무리 생각하면서 딸칠 수도 있고 키스도 되고 만질 수도 있다지만……, 아 젠장. 나 뭔 얘기 하냐.”

취중이라도 못할 말인 건 아는지 말하다 말고 돌아누워 버린다. 그리고 잠잠하더니, 등을 돌린 채로 말을 이었다.

“신카이 그 자식은…, 몰랐겠지. 지놈하고 자고 나면 며칠은 밥도 제대로 안 넘어가고…, 아프니까 힘들고…. 그걸 모르게 한 게 잘못일까?”

“…….”

“그런데 어쩌라고. 신카이가 그 띨띨한 얼굴로 미안하다거나…, 자꾸 괜찮냐고 묻는 그런 거…, 보고 싶지 않았는데……. 망할 놈. 그럼 하질 말던가.”

이야기 하는 본새를 보아 하니, 일전에 털어놓았다고 그렇게 나아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그만큼 힘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아하니까, 견뎌내려 했던 거겠지. 킨조는 소리 없이 쓴웃음을 흘렸다. 역시 녀석은 너무 단순하다.

“뭐,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겠지……. 그거 받아주는 대신에…, 내가 지랄 떤 것도 많았으니까. 핫, 모르겠다…….”

졸린지 목소리가 계속 늘어졌다. 이미 반쯤은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라키타는 다시 바로 누우면서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거의 잠꼬대에 가깝게 중얼댔다.

“아무튼 간에…, 이제 깔릴 일도 없겠지만…, 젠장. 생각하기 싫다. 이젠…….”

 

그 말을 끝으로 잠잠했다. 그런 아라키타를 곁눈질한 킨조는 책을 덮어서 스탠드 옆에 놓으며 생각했다. 불과 얼마 전이겠지만 확실히 어려서 서투른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아라키타와 신카이 말이다. 아마 신카이는 상대방이 좋으면 제동을 못 거는 타입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스프린터라는 녀석들은 양보라는 걸 할 줄 모르고, 아라키타도 마찬가지로 지거나 물러서는 건 질색하는데다 단순하니 서로 좋아하면서도 자꾸만 부딪혔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까지 보아 온 아라키타는 한 가지에 몰두하는 것밖에 모르는 녀석이었다. 그러니 헤어지고 조금 시간이 흐른 지금도 계속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진심으로 원망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녀석의 욕구를 받아 준 자신을 탓하기에는 억울하니 섹스 자체에 대해 계속 후회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하던 킨조는 아라키타를 돌아보았다. 완전히 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그는 스탠드를 끄려다 말고 아라키타에게 가까이 다가가 내려다보았다. 반듯한 이마에, 세수하면서 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다. 감긴 눈의 긴 아래쪽 속눈썹, 약간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고른 이가 보였다. 정작 녀석은 새 애인이 안 생긴다고 투덜거리면서 자기 얼굴이 영 아니라고 하는데, 킨조는 아라키타의 그런 부분만 보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중증이었다.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보니 조금씩 얼굴 간격이 좁아졌다. 그리고 손을 뻗어서 세 손가락으로 아라키타의 뺨을 쓸었다.

“으응……. 좀…….”

아라키타가 짜증스럽게 앓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잠결에 하는 반응인지 그 뒤로는 잠잠했다. 조금 머뭇거리던 킨조는 다시 손을 가져가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벌써부터 머릿속에서 정지신호가 깜박였다. 이렇게 조금씩 조심스럽게 건드릴수록, 쉽사리 손대지 못하고 있을수록, 갖고 싶고 온 몸으로 사랑해주고 싶다는 욕구가 부풀어 오르는 탓이었다.

‘더는…….’

더는 손대서는 안 된다는 생각, 그리고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혼재했다. 술 취한 건 아라키타인데 더 위태한 건 킨조였다. 자신이라면 좀 더 상냥하게 할 수 있다는 치기가 일었다. 녀석의 모든 고뇌를 들어버렸다거나, 지금 녀석이 인사불성 상태로 잠들어 있다거나 하는 사실에서 오는 죄악감 앞에서 그 감정이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툭-.

“아……?”

 

킨조는 멈칫했다. 잠결에 자신을 만지는 손길에 아라키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젓다가 손등끼리 부딪혔다. 그러더니 짧게 소리를 내며 게슴츠레 눈을 떴다. 난감하게도 거의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은 상태였다.

 

“킨조……?”

“…….”

 

졸음기와 술기운에 간신히 뜨고 있는 눈이었다. 집에 막 왔을 때보다도 더 몽롱한 상태로 보였다. 이걸 꿈이나 착각으로 여기게 놔두고 모른 척 자야 하는 게 아닐까. 이성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킨조, 왜…. 웁…….”

 

그렇게 무방비한 눈길이 마음을 뒤흔들 줄이야, 차라리 그 특유의 사나운 눈매로 째려봐줬다면 물러나 줬겠지만 지금으로선 참을 수가 없었다. 킨조는 스스로의 교활함을 속으로 비난하면서도 아라키타에게 입맞췄다. 어깨를 밀칠 듯하던 손이 힘이 없는 탓에 아래로 떨어지려다가 킨조의 옷을 붙들었다. 뭔가 말을 하려는지 움직이며 비음을 흘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혀끝으로 쓸었다. 찬바람이 부는 날씨 탓인지 입술 겉 부분이 거칠거칠하게 일어나 있었다. 그런 아랫입술을 빨아당기다가 다시 입을 약간 벌려 포개고 혀를 밀어넣었다. 아라키타의 다른 쪽 손이 킨조의 가슴에 닿았지만, 킨조는 그를 설득이라도 하듯 더 집요하게 키스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아라키타 뿐 아니라 킨조마저 숨이 가빠져 올 무렵에야 그는 떨어져나가 줬다. 아라키타는 축 늘어져 누운 채로 헐떡거리면서 킨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아……, 하아……. 킨조 너…….”

 

찡그리고 있지만 멍한 눈 속에서 혼란이 읽혔다. 그리고 조금은 두려운 기색이었다. 아마 아라키타는, 지금 자기가 제대로 몸을 못 가누고 있어서 그 두려움이 더하지 않을까 싶었다. 받아들이기 버거운 사랑을 앞세운, 맹목적인 상대방 앞에서의 무력감이 되새겨지는지 그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가리면서 몸을 움츠렸다.

 

일을 저지르긴 했지만 스스로도 혼란스러웠던 킨조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아라키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신에게 보이는 저항이 약하다고 해서 괜찮은 것이 아니었다. 지금 아라키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건 나쁜 꿈이라고 여기고 있을까? 친구라고만 생각하고 자신의 치부와 쓰린 경험을 털어놓은 상대가 이러는 것에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을까? 예전의 힘들었던 정사들이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지금의 상황에 무력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거기까지 생각한 킨조는, 자기 위주로 생각하고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사실을 느꼈다. 이 국면에 와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부터가 최저였지만, 그만두지 못하는 이상 배려는 최대한으로 해줘야 하지 않을까.

 

“미안하다, 아라키타.”

킨조의 그 말에 아라키타는 움찔했다. 그런 녀석에게 살며시 몸을 포개 안고, 뒷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킨조는 아라키타의 귓가에 속삭였다.

“미안하다. 겁먹지 마. 널 아프게 하지 않는다.”

“…….”

“잘못되지 않아. 부드럽게 할 테니까 진정해라.”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이며 얼마나 다독였을까, 킨조의 어깨를 붙들고 있던 양손의 부들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리고 한껏 망설이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달래고 승낙을 받아내자 그제야 킨조 역시 일말의 안도감이 들었다. 안고 있던 팔을 푼 킨조는 아라키타의 눈가에 한 번 입맞추고, 그의 셔츠 아랫단을 붙잡고 올렸다. 그리고 바지 앞섶을 여는 찰나였다.

“야, 킨조…….”

아라키타의 부름에 킨조는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보았다. 아까보다는 그나마 평소와 가까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인상은 쓰고 있어도 눈동자는 미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거, 아프면…….”

“그럼 언제가 되었든 그만하지.”

 

망설임 없는 대답에 아라키타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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